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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100도씨 박영민 박지용 김재덕 화상 입은 주막손으로 수묵화 그리는 할머니 간암에 걸린 아버지에게 간이식 해준 고등학생 아들 3천원으로 천만원 모은 환경미화원 간암이식 가능한 나이..

강연 100도씨 박영민 박지용 김재덕 화상 입은 주막손으로 수묵화 그리는 할머니 간암에 걸린 아버지에게 간이식 해준 고등학생 아들 3천원으로 천만원 모은 환경미화원

 간암이식 가능한 나이 화상 손으로 수묵화 그리는 할머니

 

 

 

김재덕(59세, 男, 3천원씩 저축해 천만원 모아 저축상 받은 환경미화원)
“3천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0회 저축의 날 시상식에서 신협 조합원 및 직원 5명이

영예의 수상을 했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매주 3번 2천원~3천원씩 저축해 10년이 지난

 뒤 1천만원을 모은 의정부 신우신협 조합원인 김재덕(57)씨가

지난 10월 29일 제50회 저축의 날에 받기 어려운 금융감독위원장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두 아들의 진학에 도움을 준 의정부장학회에

 1년에 36만원여원을 매년 후원해 오다 최근 회원제도로 년 24만원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어 귀감을 보이고 있다.

 

 

-경비북부포커스 인터뷰 내용 중에서-

 

▶매주 3번 2천원~3천원씩 저축을 하고 있다. 저축을 몸에 밴 습관처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너무 어렵게 살다보니 월.수.금을 신협가는 날로 정해놓고 신조를 가지고 하고 있다.

아들이 원급타면 그것까지 다 넣어준다.

저축의 습관을 아이들에게도 생활화하게 하기 위함이다.

통장에 잔고가 없으면 불안하다.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환경미화원에 만족한다.

내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왔는데 시설관리공단과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만족한다.

 

▶왜 저축을 하는지?

요즘 많은 젊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보지 않고 부모가 주는 돈으로 쓰다보니

우리는 마트나 세일하는데 찾아다니며 물건을 사지만 편의점에 가서 비싼걸 사먹기도 한다.

돈 벌기 어려운 줄을 잘 모른다.

저축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정년퇴직이 4년정도 남았지만 푼돈이 목돈되는 걸 느꼈기 때문에 계속 저금하고 싶다.

퇴직후에는 꾸미 있다.

육개장 전문점 같은 것을 하나 차리고 싶다.

 

크게 넉넉한 삶이 아닌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고 들었는데

너무 어려웠던 시절 우리 아이들이 대학 갈 때 의정부장학회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하루 1천원꼴로 신협 다니는 것으로 1년 계산하면 36만5천원이 나온다.

나도 어려워 장학금을 탄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매년 36만5천원씩 후원을 했다.

지금은 회원제로 돼 1년에 24만원을 후원하고 있다.

 

 

▶언제까지 저축을 할 계획인가

내가 하는데까지 하고 내가 못하면 대를 이어서 꾸준히 할 생각이다.

군에간 작은애는 한달에 60~70만원씩 계속 부었다.

지금은 2300만원을 타서 정기예탁을 들어놓았다.

가족 모두가 저축에 심혈을 기울여 하고 있다. 신협에서 준 상금도 모두 저축했다.

너무 고맙다.

 

▶앞으로의 인생 설계나 계획을 밝혀달라

내가 배우지 못하고 그랬지만 인생역전으로 인생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환경미화원으로, 식당하면서 노점상도 했고 공사판에도 다녔다.

없이 살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상도 타고 이런 위치에 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퇴임후에는 육개장 집도 차려서 베풀고 싶고 이런걸 강의도 하고싶고 이런게 소망이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김재덕씨.

 가난한 살림 탓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돈벌이에 나선 그는 인삼밭

말뚝 옮기는 일부터 이발소 보조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찾아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군 제대 이후 가구 공장에서 일하던 중 아내를 만나게 됐고,

결혼을 반대하는 장모님을 3년간 설득해 결혼에 성공했다.

검소하고 부지런한 아내와 함께 식당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지만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부부는 꾸준히 일을 했고,

 45살에는 한 건물의 청소관리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식당과 청소일을 병행하며 월, 수, 금 요일을 정해

3천원씩 저축을 시작했다.

작은 돈이지만 저축에 재미를 들인 그는 은행에서 수금하던 사람이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됐을 때는 본인이 나서 주변 상인들의 저축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꾸준히 모은 3천원은 12년 만에 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됐다.

그리고 51살부터는 환경미화원 시험에 도전하여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26대1의 경쟁률을 뚫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됐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작년에는 주변에 저축을 장려한 공을 인정받아

저축의 날에 수상의 영광까지 얻게 됐다.

3천원이라는 돈도 고귀하다 말하는 그. 배운 것 없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미화일이 감사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지용-

 

박지용(18세, 男, 간암 걸린 아버지 위해 간이식 해준 고등학생 아들)
“⅔(삼분의 이)”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던 박지용군.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가 회사일로 신경 쓰는 모습을 보게 됐고

 이후 집안형편이 어려워진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 지용군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도 큰 걱정없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데 어느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름 아닌 간성혼수로 인해 아버지가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그때부터 아버지는 입퇴원을 반복하며 간경화 치료를 받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고 결국 간암으로 진행됐다.

 유일한 치료법은 간이식이었는데 가족 모두 검사를 했지만 조직이

 맞는 사람은 지용 군 뿐이었다.

아직 어린 그에게 가족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렸고, 간암으로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지용군은

망설임 없이 간 이식을 결심했다.

 하지만 간이식을 하려면 만 16세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는 만 16세가 되려면 2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2달 뒤, 생일을 맞이하면서 만 16세가 된 지용군은 아버지와

함께 수술대에 올랐고 간의 3분의 2가량을 아버지에게 이식했다.

 이제 아버지와 함께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용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박영민-

 

박영민(78세, 女, 전쟁 중에 화상을 입고 조막손으로 수묵화 그리는 할머니)
“그래도”

집안의 귀한 늦둥이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박영민 할머니.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폭격으로 인한 화재 때문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손과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됐다.

 한순간에 얼굴을 잃어버린 그녀는 이후 수차례의 수술을 했지만

예전의 얼굴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결혼한 큰오빠 집에 맡겨진 할머니.

설거지 한번 해본 적 없던 할머니는 불편한 몸이지만 가족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노력했고 어린 조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며 살았다.

그렇게 키운 조카들이 장성해 품을 떠나게 됐고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혼사가 오가기 시작했고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기대어 살겠다는 마음으로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평소에는 다정하지만 술을 마시면 주사가 심한

 남편 때문에 맘고생을 심하게 했지만 엄마가 제일 예쁘다는

 두 자식들을 보며 엄마로, 아내로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홀로된 할머니는

 붓 하나 쥐기 어려운 조막손으로 수묵화를 그리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있다.

장애로 인해 힘든 시간을 견디고 더 단단하게 일어서게 됐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