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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500년 왕조의 서막 경복궁 박석의 비밀 한양 천도 정도전 요동정벌 역사저널 그날 12회

이성계 500년 왕조의 서막 경복궁 박석의 비밀 한양 천도

 정도전 요동정벌 역사저널 그날 12회

 

 

이성계, 500년 왕조의 서막을 열던 날

15세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
정도전이 구상하고 이성계가 실현한 조선 개국 프로젝트.
그들이 꿈 꾼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500년 왕조의 서막이 열린 그 날을 돌아본다!

 

 

■ 고려의 옥새를 받은 이성계, 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나?
고려 신하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른 이성계, 그는 국호와 제도를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른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즉위 1년 후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다. 단군조선의 혈통과 독자성, 기자조선의 수준 높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려는 의미에서였다. 이성계가 연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국가로 탄생한 조선을 살펴본다!

■ 계룡, 무악, 한양 도읍지 삼파전!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이성계의 즉위 직후 떨어진 천도의 명령. 시기상조라는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이성계는 천도를 강행한다. 당시 후보지로 거론 된 계룡과 무악을 제치고 도읍으로 결정 된 것은 한양! 한양이 도읍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600년 수도의 탄생에 얽힌 비화를 공개한다!

 

한양 천도 이유

 

 


조선 건국후 새 도읍지로 한양이 결정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거론되었다.
하나는 '도리균(道里均)'이라 해서 한반도내 모든 지역과의 거리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바로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에서 동남쪽의 부산과 서북쪽의 신의주까지의 거리가 비슷한 것과 남서쪽의 목포와 동북쪽의 두만강하류까지의 거리가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국토가 압록강 두만강까지 확대된 것은 세종때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한반도 전체를 국토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서울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압록강 두만강 지역도 우리의 확실한 영토로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조운(漕運)이 통한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쉽게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은 매우 교통이 편리하다. 남한강을 따라 충주 등 내륙 깊숙이까지 뱃길로 연결되어 영남지방도 쉽게 갈 수 있고,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해안에서는 배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육상교통도 편리하다. 특히 산악지역인 함경도지역에 갈 때는 서울에서 철원평야를 거쳐 추가령지구대를 따라가면 원산만에 이르고, 원산만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면 두만강까지도 어렵지않게 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때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한양의 단점으로 도성 터가 좁다는 점도 지적되었지만 위와 같은 이유에서 결국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었다.

지금의 서울지역에 신도읍 자리를 정할 때도 두 곳이 물망에 올랐다. 한 곳은 무악산의 남쪽 - 지금의 신촌근방이고, 한 곳은 북악산의 남쪽 - 현재의 서울도성자리이다. 두 곳에 대한 여러 검토를 거쳐 결국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현재의 서울자리에 도읍을 옮기기로 확정하였다.

■ 경복궁 바닥에 깔린 박석의 비밀은?
새 도읍 한양의 설계를 책임진 것은 정도전. 그 중에서도 왕의 거처인 경복궁의 설계는 정도전 도시설계의 정점이었다. 경복궁의 규모, 설계, 그리고 이름까지 정도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정도전은 각 전각의 이름에는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경계를 담았다. 조선을 향한 정도전의 꿈을 담은 경복궁, <신병주 교수의 역사 돋보기>를 통해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궁궐 이야기를 들어본다!

1404년 10월. 창덕궁 건축을 담당하는 한경이궁조성제조(漢京離宮造成提調)에 임명된 이직(李稷)과 신극례(辛克禮)는 큰 고민에 빠졌다. 경복궁의 이궁인 창덕궁의 위치를 한양 향교동 일대로 정한 뒤라 본격적으로 창덕궁 건축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중 인정전은 왕이 집무를 보는 곳이기 때문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했다.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조선 최고의 목장(木匠)들을 불러 모았다.
“이곳에 세워질 인정전은 궁의 핵심이다. 신하들이 전하께 하례를 드리고 타국에서 온 사신이 알현하는 중요한 장소다. 인정전 건축을 담당할 너희들에게 막중한 3가지 임무를 내리겠다. 첫째, 전하의 어명이 널리 퍼지도록 소리를 다스려라. 둘째, 전하의 위엄이 더욱 빛나도록 빛을 다스려라. 셋째,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넘치지 않도록 물을 다스려라. 이를 성사시키면 큰 상을 내리겠노라.”

 


한양대 건축공학과 전진용 교수는 ‘창덕궁 인정전 앞 공간의 음향 특성’ 보고서에서 인정전의 처마 덕분에 확산반사(Diffusion Reflection)가 효과적으로 이뤄져 소리가 잘 퍼진다고 밝혔다. 인정전의 지붕은 옆에서 봤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처마가 지붕 밖으로 뻗어 끝이 살짝 들려 있다. 이런 지붕의 구조는 월대에서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월대로 반사시켜줄 뿐만 아니라 월대가 향한 마당으로 소리를 반사시켜주는 반사체 역할도 한다. 즉 인정전의 지붕은 실내공연장에서 무대 연주자의 소리를 연주자와 객석에게 잘 전달해주는 오케스트라 쉘의 역할과 비슷하다
황석원이 제안한 마당을 이용하는 방법도 소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다. 인정전 마당에는 화강암을 얇게 깎은 박석이 깔려있다. 박석은 매우 단단해서 소리를 잘 반사한다. 또 울퉁불퉁한 박석의 표면은 소리가 잘 확산반사 되도록 한다. 전 교수는 지붕과 마당 이외에 인정전 주변을 둘러싼 회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인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을 보면 바깥쪽은 벽으로, 안쪽은 기둥으로 구성됐다. 월대에서 퍼진 소리가 회랑으로 전달되면 소리는 기둥에 반사돼 마당으로 전달된다.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으로 진행한 소리는 바깥쪽의 벽면에서 반사돼 다시 안쪽으로 전달된다. 회랑이 2중 반사벽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한 회랑 지붕의 처마구조는 공연장 실내음향설계에서 사용되는 소핏(Soffit) 역할을 해 반사되는 소리를 증폭해 안쪽으로 모아준다. 또 회랑을 구성하는 벽과 처마가 인정전 밖에서 나는 소음이 인정전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주는 역할도 한다. 인정전은 거대한 콘서트홀의 구조를 갖췄다고 할 수 있다.

■ 정도전의 요동정벌 프로젝트, 실현 가능했나?

 


성공적으로 새 왕조의 기틀을 닦은 정도전. 조선 개국 이후, 그는 요동으로 눈을 돌린다. 위화도회군으로 이루지 못한 요동 정벌을 계획 한 것이다. 사병을 혁파해 중앙군으로 편입을 시도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등,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정도전의 원대한 계획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무산되고 만다. 명과의 사대주의 관계 속에서도 실리를 추구했던 조선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새로 건국된 조선은 초기에는 명(明)나라와 사이가 좋았지만 그 뒤 명에서 조선에서 보내온 표전문(황제에게 바치는 글)을 꼬투리 삼아 '정도전은 사직의 화근'이라며 정도전을 보내라고 요구하게 되면서 관계가 악화됩니다.

 

사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물린 것은 요동정벌이 무모했다기 보다는 충분히 가능했지만 왕이 되고 싶은 그의 개인적인 욕심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와 정도전은 다시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됩니다.

 

즉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함으로써 명(明)나라에 대해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도전은 군권을 쥐고 군사를 정검하는데 당시 조선에는 20만의 군사와 예비군 10만, 도합 30만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명(明)의 주원장 역시 잘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동(遼東)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이 '조선이 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겠는가!'하면서 조선의 공격을 대비하라는 한 말이 『명실록』에 전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실제로 군사를 움직이진 않았지만 말로써 계속 협박을 늦추지 않고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하며 이성계의 분노를 사게되어 창업 공신의 대열에 끼지 못했으며, 세자 자리는 이성계가 총애하던 강씨의 소생인 이복 동생 방석에게 빼앗겼었죠. 이방원이 개국공신에서 제외된 것이 정도전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평소 왕보다 제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이방원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재상들과 왕족들의 사병까지 혁파하여 군권을 빼앗아 요동정벌에 필요한 군사를 늘리는 동시에 이방원등 야심을 가진 왕족들이 권좌를 차지하려는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방원의 처였던 민씨가 사병을 혁파할 무렵 몰래 군사를 숨겨놓았다가 결국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요동정벌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5세기,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이성계와 정도전의 손에서 500년의 왕조가 탄생한 날로 돌아간다! 1월 12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정도전과 이성계가 일으킨 조선의 탄생과정이 토크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