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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미카의 비극 피카소 독일 콘도르 비행단 신비한TV 서프라이즈 601회

게리미카의 비극 피카소 독일 콘도르 비행단

신비한TV 서프라이즈 601회

 

 

게르니카의 비극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서는 날이면! 사람
들은 전쟁의 아픔을 잠시 잊고, 활기를 되찾곤 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전투기로 인
해, 순식간에 폐허가 된 마을!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토의 유고 공습으로 온세상이 떠들썩하다. 심지어 3 대전 발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세르비아계의 알바니아계에 대한 인종청소를 종식시킨다는 대의 명분은 둘째 치고,

연일 외신은 나토의 폭격과 알바니아계 코소보 난민들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연히 비참한 이야기들 뿐이다.

코소보 지역을 떠나고 있는 알바니아계 난민들이나 공습을 받고 있는

세르비아계 사람들이나 모두들에게 전쟁은 비극일 뿐일 것이다.
과연 인권이라는 것이 주권을 능가하는 판단의 기준이 있는지에 대한

 반문을 보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사건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스페인 북부 게르니카 사람들에게는 나토의 유고 폭격이 남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악몽이 하나 있다.
1937
426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의 조용함은

 독일 나치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군사기지도 주요도시도 아닌 게르니카에 독일 나치의 콘도르 비행단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폭격으로 마을 전체 가옥의 80% 파괴되고 민간인 1500 정도가 학살되었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당시 사망자를 1654명으로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사건은 스페인 내전 최대의 비극이었다.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그림 가운데 `게르니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있다. 게르티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이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사격
연습하듯 기관총 세례와 폭탄을 퍼부었고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3시간의 폭격으로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다쳤다. 피카소의 <케르니카>는
독일군의 폭격에 대한 분노이자 고발이었다.
1930년대 유럽은 새로운 전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군비 확장에 힘을 쓰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
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커 가는 파시스트 세력과 그것을 저지하려
는 세력의 대립 상황은 스페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주제 국가였던 스페인이 공화제로 바뀐 것은 1931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주
민 세 명 중 한 명이 문맹이고 토지 소유자의 겨우 2%가 경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카톨릭 교회가 넓은 토지를 비롯하여 스페인 국가 재산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
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공화당과 사회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공화국 정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고 보통선거의 도입, 군대 개혁, 토지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지
주, 자본가, 성직자, 장교 등 전통적인 지배 계층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극우 정당인 팔랑게 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총선거
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의 정권 획득에 고무된 듯 우익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내
각에도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마드리드와 북부 공업지역의 노동자들
은 총파업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단결의 필
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 1월 공화당 좌파, 사회당, 공산당 등으로
인민 전선이 결성되었고 이어 열린 2월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우파는 이에 반란으로 답했다. 그 해 7월 식민지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 장군 (Francis Franco, 1892-1975)이 반란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에
본국의 반동 세력이 호응했던 것이다. 스페인은 인민 전선에 의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초기에는 공화파가 불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를 뒤바꾼 것
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사 개입이었다. 영국은 6만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무기,
자금을 반란군에게 지원했고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직접 군사 행동도 서슴치 않
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으로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
인했고 오직 소련만이 벙력과 무기를 보내 공화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가 차
원의 지원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 지식인, 노동자의 참전이었다. 반
파쇼 정열에 불타는 전 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스페인의 갓 피어난 민주주의
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3,4만
이었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에 참가했다. 헤
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
탈로니아 찬가> 등은 이 반파시즘 전쟁에 참가한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
킨 것들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이러한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페
인에 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부터 스페인에 자치를 요구했다. 1936년 10월 인민 전선 정부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 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 후 바스크
에서는 프랑코의 반란군에 반대하고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강했
다.
프랑코는 바스크를 공격하여 북부 지방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신무기
를 실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ring)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괴링은 히틀러가 프랑코의 반란군은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스페인 내전을 독일 신무기 실험장으로 이용하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였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최신형 폭격기, 신무기들이 이
고요한 마을을 폭격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투하되
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벌어진 약 2년 후인 1939년 3월 말 끈질기게 버티던 마드
리드가 프랑코 군대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
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마드리드가 함락
된 해 9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새로운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