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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100도씨 삼형제 족발집 청년사장 소성현 족발집 운동으로 위암 이겨낸 초등학교 김의일 교사 위암이겨낸 보디빌더 국악인 박애리

강연 100도씨 삼형제 족발집 청년사장 소성현 족발집 운동으로 위암 이겨낸 초등학교 김의일 교사 위암이겨낸 보디빌더 국악인 박애리

 

 

박애리 (38세, 女, 판소리계의 젊은 명창)

“상상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29년째 판소리 외길 인생을 걸어오고 있는 국악인, 박애리씨.

 

 

9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은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접하게 된 그녀는 그때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판소리 할 때 만큼은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그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적극적인 부모님의 지지와 지칠 줄 몰랐던 열정과 노력으로 그녀는 유망 국악인으로 주목 받았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 때, 목소리가 쉬고 갈라지는 슬럼프를 겪게 된 그녀는 가장 자신 있던 ‘고음’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그녀는 식습관도 고치고, 목 관리에 더 신경 쓰는 등 피나는 노력 끝에 창극 ‘배비장전’의 최연소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대중들과 판소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주는 곳 어디든지 달려가 판소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명창의 자리를 지키면서 대중과 판소리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성현 (33세, 男, 삼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족발집 청년사장)

 

“그리운 어머니께”

6년째 두 동생과 함께 족발 장사를 하고 있는 소성현씨.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친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었던 그는 7살 무렵,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새어머니와 살게 됐다. 하지만 사업실패로 인해 술을 마시며 방황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새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열심히 살아가는 새어머니를 틈틈이 도왔고, 유달리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에게 그때부터 새어머니는 친어머니와 다름없었다. 대학교를 간 후에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주말마다 장사를 도왔던 그. 족발가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가족들도 조금씩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던 어느 날, 뇌출혈로 인해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투병 중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가 일궈낸 족발가게를 지키기 위해 전수받은 비법을 고수하며 가게를 이어나가기 시작한 그. 그를 따라 동생들도 그와 함께 족발 장사를 시작했고, 현재 삼형제가 두 곳의 족발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의일 (57세, 男, 운동으로 위암 이겨낸 초등학교 교사)

“욕심이 사람 잡는다”

30여 년 전 초등학교 교사가 된 김의일씨. 더 큰 욕심을 갖게 된 그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가족들의 반대에도 무릎 쓰고 10여 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정리했다. 여러 사업에 전전하며 주식투자 실패 후 빚까지 지게 된 그는 아내의 권유로 다시 교사로 복직하게 됐다. 그러던 중 2008년, 50세의 나이에 위암 판정을 받은 그. 사업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와 잦은 음주가 위암의 원인이었다. 위 절제 수술 후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먹었던 음식들이 역류하는 등 힘든 시간들을 보낸 그.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윗몸일으키기, 철봉 매달리기 등 간단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술과 커피를 끊고, 채소종류 위주의 식단과 소식 등 자신만의 식이요법을 터득하며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나갔다. 점점 건강을 되찾으면서 운동에 욕심이 생긴 그는 헬스장을 다니며 하루에 한 시간 반씩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을 병행했다. 헬스장 관장님의 권유로 우연히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게 된 그는 첫 회 우승을 거머쥐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매년 대회를 준비하며 3년째 충남 보디빌딩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는 그. 위암이라는 시련이 다가왔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5년 동안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과 행복을 되찾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의일(56) 선수가 헬스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위암 2기 판정을 받고 위 대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후였다.
“당시 위암이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평소 건강만큼은 자신했었는데 암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건강에 자만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동안 삶을 잘못 살아온 것 같아 상당히 괴로웠습니다.”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누워있었던 그 시간은 그에게 건강을 비롯한 삶에 대한 총체적 반성의 시간이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지금부터 주어진 시간은 전혀 새로운 삶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삶’ 이였습니다. 이렇게 큰 병을 얻은 것은 그동안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한 것에서 왔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심적으로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어느 순간 목표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 몸도 마음도 모두 피폐하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수술 후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꾸준하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재활 훈련이 필요했던 그에게 헬스는 가장 적합한 운동이었다.


“꾸준히 운동하기 위해선 접근성이나 편리성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요즘은 동네마다 헬스장이 하나씩은 있으니 어렵지 않게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예전부터 헬스는 조금씩 해봤기 때문에 배우는데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재활훈련의 하나로만 생각했던 헬스였지만 그는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어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게 됐다.
“헬스는 마치 마라톤 같습니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지난 5년간 들어 올린 바벨의 무게만큼 자신도 성장한 것 같습니다. 최소한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이젠 일상이 됐습니다.”

 

 


또한, 그는 헬스를 시작하면서 자동차 없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한 지 4년째. 출퇴근은 물론이고 주위의 가까운 곳은 모두 자전거를 이용한다. 이제는 왕복 100km가량은 자전거를 이용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재활을 목적으로 시작한 운동들이지만 오히려 수술 이전보다 더욱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됐다.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인 변화였다.
“예전에는 그저 하루하루 주어지는 데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운동을 통해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다 보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됐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그는 올해 체육 전담교사를 담당하게 됐다. 그동안 운동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이젠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난 5년의 경험을 통해 운동이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올바른 운동의 중요성과 순기능을 잘 알고 있으며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이 교직 생활 25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한편 그는 요즘 불어 닥치고 있는 몸짱 열풍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나타내기도 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은 당연히 반겨야 할 일이지만 요즘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단기간 내에 무리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단백질 보조제나 약물을 이용한 운동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쉽게 효과를 보는 것 같겠지만, 오히려 자신의 몸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무엇보다 차근차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헬스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지만 헬스는 단기간 내에 그 효과를 거두기 힘든 종목입니다. 또, 혼자 하는 운동이다 보니 슬럼프가 왔을 때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극복해야 하는 점이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헬스는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인 만큼 그것을 극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은 타 종목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