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 함흥차사 이방원&정도전
역사저널 그날 13회
왕권인가 신권인가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그리고 조선개국의 주역, 정도전의 석연찮은 죽음!
1398년 8월
조선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태종 이방원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조선 최초의 왕실쿠데타 ‘왕자의 난’, 그날을 추적한다!
■ 이방원 VS 정도전 - 왕권인가 신권인가!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권력을 잡게 된 결정적 사건,
왕자의 난! 정도전은 이날 ‘역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죽음을 맞는다
. 원래 두 사람은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개국에 힘써온 동지적 관계!
이방원은 왜 정도전을 죽였을까?
정도전의 죽음을 둘러싼 당시의 정황들은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정도전의 죽음, 그 진실은 무엇일까?
■ 1398년 왕자의 난 주모자, 이방원을 소환하라!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개국에 결정적 기회를 제공한 이방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초기, 그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왕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권력에서
소외당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공간을 뛰어넘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왕자의 난’ 주모자,
이방원의 속내를 들어본다.
■ 건국 한 달 만의 파격적인 세자책봉! 그 배후는?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지 한 달 만에 세자 책봉을 단행한다.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조선시대!
그런데 세자로 책봉된 이는 8남중에 막내였던 방석,
이방원의 이복동생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데에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데..?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이방원의 분노를 엿볼 수 있는 청계천 광통교에
얽힌 사연까지 들어본다.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을 실권자로 만들어주었다면,
제2차 왕자의 난은 그를 진짜 왕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방원은 제1차 때는 정권에 대한 도전자의 입장에 있었던 데 비해,
제2차 때는 둘째형 이방과를 주상으로 모신 실권자로서
이방간(넷째형)의 도전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
1차 때 이방원에게 병장기를 제공했던 민씨는 2차 때는 정치적 투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1차 때보다는 2차 때의 역할이 더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위의 형인 이방간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방원은 1차 때와는 달리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복형제와 칼을 맞대야 했기 때문이다.
1차 때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이때는 아버지가 아니라 정도전을 직접 상대했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2차 때는 동복형과 직접 싸워야 했기 때문에 양심상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이방원의 결단을 촉구하고 양심을 무디게 만든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민씨였다.
정종 2년 1월 28일자 즉 1400년 2월 22일자 <정종실록>에 따르면,
민씨는 이방원에게 갑옷을 입혀주고 대의를 설명하면서 출정을 독려했다.
민씨의 모습은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을 독려하는 감독 그 자체였다.
민씨의 격려를 받은 이방원은 밖으로 나가 이방간을 격파했다.
이로써 이방원은 유력한 정적을 모두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방원에 대한 도전자가 모두 사라지자, 정종 이방과는 이방원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이 제3대 주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방원 정권이 탄생했기 때문에,
원경왕후 민씨는 단순히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정권의 대주주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주상이 임기제였고 여성도 주상에 출마할 수 있었다면,
민씨도 분명히 차기나 차차기를 노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남편이 퇴임한 뒤에 예조판서(국무장관) 직을 수행하다가
기회를 봐서 주상에 출마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씨가 정치적 파워를 갖는 것을 가장 싫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여성을 정치적 조력자로 활용하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여성과 더불어 권력을 나누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그는 민씨를 약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정치투쟁에 착수했다.
평소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항상 아내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상이 된 이방원은 권씨(권의빈, 의빈 권씨)라는 후궁을 선발했다.
권씨가 지혜롭다는 것이 최대 이유였다.
지혜를 가졌다는 것으로 보아, 권씨도 신덕왕후 강씨나 원경왕후 민씨처럼
이방원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할 만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민씨가 권씨의 후궁 책봉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극렬히 반대한 것을 보면,
권씨도 민씨 못지않은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이방원은 권씨를 궁에 들였고, 민씨는 이방원의 참모진에서 배제됐다.
이방원은 아버지뻘 참모인 하륜의 부정부패를 모두 눈감아주었다.
이것은 '하륜이 아무리 부정부패를 해봤자 왕권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부인 민씨만큼은 철저히 견제했다.
민씨가 참모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왕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방원의 견제는 권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민씨를 밀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방원은 민씨의 수족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제거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방원은 민씨 형제들의 말꼬리를 잡아 이들이 양녕대군 이외의
왕자들이 죽어 없어지기를 희망했다느니, 자기가 시험 삼아 사퇴 의사를 밝히자
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느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사형을 집행했다.
민씨의 수족들을 잘라내고 민씨를 무력화시킨 이방원은,
민씨가 눈을 감은 지 2년 뒤에 눈을 감았다.
'저 여자보다는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
'저 여자가 나보다 오래 살면 정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이방원이 2년 더 오래 살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원경왕후 민씨가 남편을 도울 때 속마음을 들키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문이 그렇게까지 파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씨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참모였지만, 남편이자 주군인 이방원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속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가 속마음을 잘 숨기고 태종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면,
태종시대와 그 직후의 정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 왕의 길 VS 부자의 길 - ‘함흥차사’ 속에 담긴 부자간의 갈등
왕자의 난으로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아들들과 충신 정도전을 잃은 태조 이성계.
결국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극에 달했던 태조와 이방원의 갈등.
왕의 길과 부자의 길 사이에서 틀어져버린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본다.
1월 19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고 강력한 왕권 정치를 펼친
태종 이방원을 조명한다!
태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함께한 신진사대부세력(정도전)을
의지하였다. 사대부들은 임금은 하늘(백성)이 만들어준 다는 생각을
가지고 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노력을 해야하며 이를 위해
정치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재상에게 맡겨여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대부들을 대변하는 정도전도 같은 생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족들(왕자)중에는 왕을두고 신하들끼리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것에대한 불만이 있었다. 이즈음 정도전의 주도로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추대하여 책봉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사대부세력 (정도전) 에게는 너무 성격이 강한 이방원이 부담스러 웠고 세자(방석)의 모친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첫번째 부인(방원 모친)은 사망한 뒤였다. 이러한 결정은 조선을 개국하는 큰 공을세운 이방원에게는 큰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이성계를 도와서 건국을 하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이방원은 당연히 세자자리는 본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나 당시 정치적상황 신진사대부, 둘째부인 강씨등 여러가지로 본인에게 불라하게 작용을 하였다. 이를 눈앞에서 그냥 두고볼 그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게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가 즉위하고 있었음에도 이방원은 사병을 일으켜서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까지 모두 죽이고 만다. 이성계는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에 환멸을 느끼고 6년(1392년 ~1398년)의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1398년 9월 둘째아들 방과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이성계는 방과(정종)마저 물러나고 방원(태종)즉위 하게되자 고향인 함경도로 떠난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여러번 차사를 보내었다. 그러나 이방원을 몹시 싫어한 이성계는 차사들이 올때마다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죽여버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