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 다큐공감 주월사령관 맹호부대장
"그대들이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
나를 파월장병이 묻혀있는 사병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으로
장군 묘역을 마다하고 병사들 곁에 잠든
故채명신 장군 !
세상을 떠난 후에도 현충원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부하들과 함께하는 사령관이었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어서도 사병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故채명신 장군의 묘를 찾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故채명신 장군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 생사를 넘나들며 선택한 군인의 길
평안남도 진남포의 초등학교 교사가 된 스무 살에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던 청년 채명신,
공산주의자들에게 몰려 목숨을 걸고 남하한 뒤 그가 선택한 길은 군인이었다.
목사가 꿈꿨던 청년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전쟁터로 향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참전을 거치며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함께 전장을 누비는 병사들이었다.
▶ 탄 할머니와 채명신 사령관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베트남 중부 퀴논 지역에는 지금도 한국인 채명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탄 할머니도 그중 한사람이다. 베트남전 당시 16살 소녀였던 탄은 한국군 관사에서 일을 했다. 정이 많았던 채명신 사령관은 군인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로 적과 민간인을 구분하기 힘들었던 상황에서도 채사령관이 이끄는 한국군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가족처럼 지내면서 당시 한국군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지금도 채명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베트남 사람들, 그들을 만나 본다.
▶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구하라!
베트남전에서 故채명신 장군은 초기 맹호사단장으로,
그 후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며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했다.
베트남 양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민심을 확보하는 전술 전략을 펼쳤던 그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구한다는 신념을 잊지 않았다.
6·25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한 전술을 이용해 승리로 이끈
‘두코(Duc co) 전투’와 ‘짜빈동 전투’는 세계를 놀라게 한 전투였다.
▶ 3.3㎡(1평)의 사병 묘역을 선택한 장군
현충원이 문을 연 뒤 최초로 계급을 낮추어
사병 묘역에 안장된 故채명신 장군!
살아서도 눈물지으며 사병 전우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어서도 사병들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령관이었지만 언제나 사병과 같은 자리에 있었던 참군인-.
그의 묘비명에는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그의 군인 정신이 담겨있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참전용사에서부터 생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오늘도 제각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故채명신 장군의 묘를 찾는다.
사령관으로서의 신의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우리시대의 장군 故채명신 -.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베트남전 초대 한국군 주월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영결식이 서울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됐다.
영결식에는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은 월남전에서 전사한 사병들이 묻힌 제2묘역 맨 앞 열의 3.3㎡(1평)에 안장됐다.
비석 역시 병사들과 같이 높이 76㎝, 폭 30㎝, 두께 13㎝의 화강암으로 세워졌다.
고인은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이후 5사단장, 주월 한국군사령관, 2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중장으로 예편 후에는 1972~1977년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거쳤으며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회장,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