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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역사저널 그날 중종 강제 이혼 기묘사화 연산군 이복동생 중종 단경왕후 조광조 단경황후 복위 상소사건

중종 역사저널 그날 중종 강제 이혼 기묘사화 연산군 이복동생 중종 단경왕후 조광조 단경황후 복위 상소사건

 

중종, 강제 이혼 당한 날


조선시대
강제로 이혼 당한 왕이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신하들의 추대로
왕이 된 ‘중종’

그런데 즉위 일주일 만에중전 단경왕후가 폐위된다…!
조강지처와 생이별한 중종의 속내는 무엇일까?

조선사에서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왕, ‘중종’
그의 또 다른 모습을
“역사저널 그날”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 ‘신하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 중종이 강제 이혼 당한 그날!
1506년, 신하들의 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은 12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 뒤를 이어 추대된 왕은 바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
그런데 중종이 즉위한 직후 반정공신들은 중전인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한다. 결국, 중종은 왕이 된지 일주일 만에 자신의 부인인 단경왕후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하는데…! 결국 단경왕후 신씨는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왕비였던 여인이 됐다. 중종이 부인을 폐위시켜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강제 이혼 당한 중종, 그 뒷이야기!
어린 나이에 혼인해 7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신하들에 의해 강제 이혼을 당한 중종! 인왕산의 ‘치마바위’에는 이혼 후 중종과 단경왕후의 절절한 사연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드라마에서도 중종은 신하들 몰래 단경왕후를 만날 만큼 순애보를 간직한 왕으로 그려지는데….
실제 중종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사망하면서 중전의 자리는 다시 공석이 되고, 일부 신하들은 단경왕후를 다시 왕비로 모셔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중종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단경왕후 복위 상소사건’을 통해 중종을 알아본다!

■ 중종이 선택한 남자, 조광조와 그의 죽음
‘단경왕후 복위 상소사건‘을 통해 정치 전면에 등장한 조광조! 과감하고 강단 있는 조광조의 모습에 중종은 자신의 뜻을 실현해줄 정치적 파트너로 그를 선택했다. 새로운 정치를 꿈꿨던 중종과 조광조. 하지만 4년 뒤,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종이 내린 사약이었다.
집권 초 신하들에게 휘둘리던 유약한 왕에서 노회한 정치가로 변모한 중종의 또 다른 모습! 조광조를 임금의 정치적 동반자에서 반역자로 몰아 간 기묘사화의 그날을 쫓아가본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 이상주의적 왕도정치를 급진적으로 구현 하려던 조광조 등 신진 도학자들이 수구파인 남곤, 홍경주 등에 의해 숙청된 사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의 문신이며 성리학자, 정치가로 호는 정암(靜庵), 김굉필(金宏弼)의 문하 였으며 1510년 진사시에 장원, 홍문관에서 여러 직을 거쳤으며 1518년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 직에 재직 중, 급진적인 개혁정치와 현실에 먼 이상주의정치를 실현하던 과정에서 수많은 훈구파의 정적을 만들었으며, 결국은 이들에 의해 1519년 삭탈관직된 후 사사되었음.

후에 인종 원년에 복권, 선조 때에 영의정에 추증된 “동방5현” 중의 1인.

위훈삭제(僞勳削除)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개혁과정 중 중종반정의 공신 117명 중 뚜렷한 공로가 없는 공신 76명을 공신에서 삭제하고 직위를 박탈, 나라에서 내린 전답과 노비 등을 환수하여 나라에 귀속시킨 사건.

주초위왕(走肖爲王)

위훈삭제 사건 이후 훈구파는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을 제거하기위해 중종의 후궁인 홍경주의 딸을 이용하여 궁중 안의 나뭇잎에 “주초위왕”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의미의 네 글자를 꿀로서 쓴 뒤,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개혁파인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은 기묘사화에 휘말리게 됨.

출처-다음지식

 

■ 재위기간만 38년…! 중종이 남긴 것은?
총 27명의 왕이 있었던 조선시대, 중종의 재위기간은 과연 몇 년이었을까? 의외로 중종은 역대 조선왕들 가운데 재위기간이 다섯 번째로 긴 왕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한 왕이었던 것!
<역사저널 그날> 에서는 중종이 단경왕후와 강제 이혼을 당한 그날을 통해 유약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노회한 정치가로서 왕위를 지켜내고자 했던 임금, 중종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갖는다.

스페셜 패널 송웅섭 교수와 함께 ‘샤론 스톤’의 목소리로 유명한 강희선 성우가 단경왕후역의 내레이션을 맡아 더 깊이 있는 토크를 풀어나간 <역사저널 그날>! 이순구 박사를 모셔 조선시대에 있었던 이혼제도까지 엿볼 수 있어 시청자들에게 더욱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저널 그날> ‘중종, 강제 이혼 당한 날’ 편은 5월 18일 밤 10시 35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건국 90주년이 된 조선왕조가 삐걱거리던 1482년, 조광조는 한양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과거시험보다는 정치변혁에 관심이 더 컸던 그는 26세 때였던 1507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다. 동지들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명문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1507년은 쿠데타군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 임금을 옹립한 중종반정(1506년)이 벌어진 이듬해였다. 조광조는 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새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뒤 혁명보다는 개혁으로 선회한 조광조는 과거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는 29세 때인 1510년에 과거시험 소과(小科)에 장원급제하여 진사 자격을 취득한 뒤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학내 개혁운동을 벌이다가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이마저도 잘 피해나간 그는 서른네 살 때인 1515년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발을 디디게 된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 뒤, 조광조는 가슴속에 숨겨둔 개혁의 칼날을 꺼내든다. 자신이 속한 사간원 관료들뿐만 아니라 사헌부(지금의 검찰청 기능 보유) 관료들까지 전원 교체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린 것이다. 신입 관료가 올린 이 상소는 조정 전체에 메가톤급 충격을 가한다.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로부터 9년 전, 연산군의 12세 연하 이복동생인 중종은 쿠데타 주역들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훈구파로 불리는 이 쿠데타 주역들은 중종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중종의 부인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중종의 부인은 연산군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씨와 이혼하게 된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자료 오마이뉴☞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7676

 

중종은 1506 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의 옹위에 의해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즉위 후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통한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나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을 제압하지 못 했다.

1510년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왜인 거류민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고 조선 조정에서 쓰시마에 보내던 세견미를 반으로 줄이고 삼포 중 제포 하나만 개항하되 왜인들의 거주를 금했다.

중종은 1515년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를 정치 일선에 끌어들이고 조광조를 앞세워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고했다.

조광조는 사림의 천거에 의한 등용 제인 현량과를 실시하여 신진사류 28명을 요직에 배치하고 급진 개혁 정책을 추진했는데 개혁 정책이 너무 과격하여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훈구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조선의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여러 곳에서 왜인들의 변란이 일어나고 북방에서도 야인들이 내침하여 노략질을 하므로 1517년 외침에 대비하여 여러 부서가 그때그때 대비하는 합좌 회의 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했다.
1519년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반정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빌미로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상소를 올려 마침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던 중종으로 하여금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을 숙청하도록 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한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두둔했던 좌의정 한당과 그 자손들이 1521년 정적인 남곤, 심정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를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중종은 1544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재위 기간은 38년이나 되었다.

가지고 온곳 ☞ http://blog.naver.com/funmaxu/20206892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