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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이괄의 난 역사저널 그날 이괄 황왜 안현전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역사저널 그날 이괄 황왜 안현전투 인조반정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


인조반정 날 임시 대장 추대,
반정 성공 후 2등공신 책봉,
후금-명 혼란기에 북방 경비의 핵심 인사, 이괄(李适).

그러나-
인조반정 1년 후, 반정공신 이괄은 한양으로 진격한다.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그는 왜 역모를 꾀한 것일까?

인조 정권을 향해 반란의 칼을 꺼내든 이괄의 난, 그날!
조선 땅에 두 명의 왕이 존재했던
그날 속으로 돌아가 본다!


■ 인조반정 공신 이괄, 반란의 칼을 뽑아들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난 날, 반정군 대장 김류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군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거사가 중단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이괄이 임시대장으로 추대돼 전열을 정비한다. 하지만 뒤늦게 김류가 나타나고, 이괄은 다시 대장 자리를 넘긴다. 게다가 반정 성공 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북병사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결국 공신 책봉에서 2등으로 밀려난다. 공신책봉 약 3개월 뒤, 이괄은 12,00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한다. 반란의 칼을 빼든 것! 반정 공신 중 11번째에 이름을 올렸고 인조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던 무신(武臣), 이괄. 그는 왜 반정에 성공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반을 꾀한 것일까? 그가 인조와 반정공신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조선 하늘 아래 두 명의 임금, 두 개의 조정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된 인조. 하지만 반정공신들은 정권을 돌보기보다는 광해군 세력들을 숙청하기 바빴다. 인조가 왕이 된 후 1년 사이 수백 명이 처형 혹은 유배되자 민심도 흉흉해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후금과 명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언제 조선에게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북방을 지켜야 할 신하 이괄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한양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오는 이괄의 기세에 놀라 인조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피난을 떠난다. 조선 역사상 반란에 의해 왕이 도성을 떠난 유일한 사건!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옹립하고 한양에 무혈 입성한 이괄, 결국 조선 하늘 아래 두 명의 임금이 존재하는 믿기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괄군 전력의 비밀 - ‘항왜’는 누구인가?

 


반란을 일으킨 후 영변(寧邊)에서 한양까지 약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내려온 이괄. 이괄 부대가 길목을 지키던 관군을 모두 격파하며 뛰어난 기동력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괄 부대의 강한 전력에는 반란군의 선봉에 섰던 항왜가 있었다. 영화 <명량>에서 ‘준사’역으로 등장했던 자가 바로 항왜. 과연 항왜란 누구일까? 박금수 박사와 함께 당시 맹활약했던 항왜의 무기와 검법 등을 직접 시연하며 항왜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본다.

■ 관군 VS 반란군, 최후의 결전 - 안현전투(鞍峴戰鬪)
이괄의 반란군에게 도성을 빼앗긴 인조와 관군들은 반란군을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고지 안현(鞍峴) 지역을 기습 점령하고 반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 연이은 승리로 사기 충만한 이괄 부대 vs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맞선 관군. 치열한 결투 끝에 관군은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데... 그 동안 반란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던 관군들은 어떻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까? 반란의 주동자 이괄의 최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단 20여 일간에 걸쳐 일어난 역모사건 이괄의 난. 이후 조선의 운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불씨가 된다.

 


500년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왕을 몰아내고 도성을 차지한 이괄의 난! 반정공신에서 1년 만에 모반의 수장(首長)이 된 이괄의 이야기가 이번 주 토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찾아간다.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최명길·김자점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을 이끌고 홍제원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 장만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상원-평산-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에서 정충신과 남이흥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에서 전탄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을 나와 광주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