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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군 어머니 흥청제도 흥청 운평 갑자사화 흥청망청 유래 어원 뜻 폐비 윤씨 조선 삼사 역사저널 그날

연선군 어머니 흥청제도 흥청 운평 갑자사화 흥청망청 유래 어원 뜻 폐비 윤씨 조선 삼사 역사저널 그날

 

 

연산군,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날

“임금은 성종의 후궁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李?)과 봉안군 이봉(李?)을 잡아와
제 어머니를 몽둥이로 치게 하였다.”
- 연산군일기 1504년 3월 20일

 

연산군 10년에 벌어진 참혹한 비극,
연산군은 왜 아버지의 후궁을 죽인 걸까?

마음대로 왕권을 휘두르다 쫓겨난 미친 왕
vs
어머니를 잃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
연산군의 두 얼굴, 그의 진실을 밝힌다!

 

 

■ 연산군, 희대의 패륜아 혹은 치밀한 지략가
16C 초 조선을 공포로 몰아넣은 폭군 연산군. 일반적으로 연산군의 광기는 어머니 폐비 윤 씨를 위한 복수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성종 때부터 비대해진 조선의 언론 기관 삼사(三司)! 당시 삼사는 대신들은 물론 왕도 함부로 무시 못 할 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력한 신권과 누구보다 절대적인 왕권을 추구했던 연산군. 그 둘 사이의 충돌은 예고된 비극이었다.

 

 

■ 연산군의 기녀 흥청, 1000명의 진실!
갑자사화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연산군. 그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미색이 뛰어나고 춤과 노래에 재능 있는 기녀들을 뽑아 올리게 한다. 왕의 특별한 기녀, ‘흥청’과 ‘운평’은 그 숫자가 1000여 명이 넘었다. 왕의 사랑을 받은 흥청은 녹봉과 몸종을 받은 것은 물론, 대신들도 예를 갖추어 대해야 할 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반면, 흥청에게 드는 비용은 그들의 고향에서 대게 했는데 이 때문에 흥청을 배출한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연산군의 폭정에 기름 역할을 한 흥청 제도! 조선시대 기녀제도 전문가를 통해 흥청에 대한 궁금증을 속속들이 풀어본다!

 

■ 흥청제도란 ■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국민일보 1999.11.26

興淸(흥청) - 흥청망청의 흥청은 연산군이 궐내에 출입시킨 일등급 기녀

 

 

■ 광기의 끝 - 민심을 잃다.
향락, 사치, 엽색 행각을 일삼은 연산군은 사생활 보호에 민감했다. 대궐의 담을 높이고 궁궐 주변 100리까지 금표를 설치해 왕의 사유지를 넓혀 갔다. 금표 지역 내에 살던 백성들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야 했다. 생활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도적이 됐고 조선 전체가 큰 혼란에 빠져든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연산군의 광기는 국가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었다.

 

 

조선 개국 100년,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폭군 연산군. 그의 광기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 숨겨진 내막이 4월 13일 일요일 밤 10시 35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가지고 온곳: http://blog.naver.com/funmaxu/20206695596

 연산군은 1476년 성종과 숙의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윤 씨가 폐출될때 4세의 어린아이였고 왕의 엄명으로 모두들 폐비 사건에 대한 비밀을 지켰기 때문에 계모인 정현왕후를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1483년 성종이 8세의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이때는 왕비 소생의 왕자는 연산군 뿐이라 어쩔 수없이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연산군은 19세의 나이로 등극했다.

즉위 후 4년간은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비융사를 설치하여 병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을 설치하는 등 빈민 구제에도 힘을 썼다.하지만 사림파 관료들이 사사건건 간언을 하고 학문을 강요하자 사림들을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1498년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했던 유자광,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무오사화를 계기로 연산군은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세력과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고 조정을 독점하게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끌어들이고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 들을 흥청이라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양반들의 착취에 못 견딘 농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자 이들을 무장시켜서 양반이나 관청을 습격하는 도적들이 나타났다. 서얼 출신의 홍길동이 양반 관리의 복장으로 도적들을 이끌고 경기도와 충청도의 여러 관청들을 약탈하다가 1500년에 체포되었다.

조정 대신들이 왕에게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했으나 때마침 임사홍이 폐비 윤씨 사건 을 밀고하자 연산군은폐비 윤 씨 사건을 이용하여1504년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후 연산군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들은 모두 제거하고 언론의 주축인 사간원을 없앴으며 성균관을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냥을 즐기기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내의 민가를 철거 하기도 했다.

 연산군의 폭정이 더욱 심해지자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2달 뒤에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