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세종대왕 공법 1430 조선 첫 국민투표
사민정책 세종 출산휴가
1430년 조선, 첫 국민투표 하던 날
왕의 말이 곧 법이었던 절대왕권시대.
그런데 1430년,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전국민 국민투표가 실시된 것!
조선의 첫 국민투표가 있었던 그날,
세종이 백성과 더불어 꾸었던 꿈은 무엇일까.
■ 조선에 국민투표가 있었다?
1430년, 새로운 세법인 ‘공법’의 시행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조정에서 세종은 아주 특별한 제안을 한다. 납세자인 백성들에게 직접 찬반 의견을 구하자는 것. 이 조선 최초의 국민투표는 노비와 여성,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나 백성들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세종. <역사저널 그날>에서 조선 백성이 첫 투표하던 그 날을 생생하게 중계한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은 즉위 초기 세금제도 개혁을 놓고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적이 있다. 토지와 관련된 전세(田稅)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제도를 도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풍흉의 정도를 파악해 세율을 정하는 기존의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으로는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토지를 조사하는 관리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되거나, 뇌물을 받고 낮은 세액을 책정해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중·삼중고를 안겼던 세금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일기에 따라 국가에서 정한 일정액을 내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러한 세금제도 개편을 단기간에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시험에 ‘공법의 개선책에 대해 논하라’고 출제해 의견을 들었다. 또 당시 조선 인구의 4분의 1가량인 17만여 명의 신민(臣民)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결국 세종은 25년에 걸쳐 공법의 정당성과 올바른 제도 정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수렴했다. 긴 시간에 걸쳐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완성된 공법 체계는 이후 왕조의 기본 조세제도로 자리 잡아 조선 초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 극심한 가뭄에도 태평성대를 이룬 비결은?
태평성대로만 기억되는 세종시대. 하지만 세종 재위 초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이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이 흙을 파내어 먹을 만큼 고통에 시달리자, 세종은 10여일을 앉은 채로 밤을 지새울 만큼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하는데...
■ 세종, 노비의 남편에게 출산휴가를 내리다.
그 어떤 것보다 앞서 백성을 생각하고 섬겼던 세종. 어버이와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그의 정신은, 시대를 뛰어넘는 인권의식으로 드러난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만백성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였던 왕의 세심한 배려는 노인과 어린이, 여자와 노비, 심지어 죄수를 아우르는 혁신적인 복지 정책으로 시행되는데... 세종 치하의 조선은 15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복지국가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 세종은 백성들을 북방영토로 강제이주 시켰다?
세종은 북방영토를 개척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립한다. 그러나 곧 이어 2천 6백여 명의 백성들을 새로운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강행하는데... 고향을 떠나 춥고 낯선 땅에서 살아야했던 백성들의 고통은 세종에게도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깊은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종은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5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그 중심에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있다! 2월 23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모든 것에 앞서 백성을 위한 섬김의 정치를 펼쳤던 세종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