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어리 세자 폐위의 진실 역사저널 그날
세자 양녕, 폐위된 날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폐하였다.”
-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1418년, 조선을 뒤흔든 세자 폐위 사건!
14년간 세자 자리를 지켰던 양녕,
그는 단순한 파락호인가, 정치적 희생양인가?
양녕대군 세자 폐위의 진실을 밝힌다!
■ 화려한 왕세자 생활의 그림자
태종과 원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로 체계적인 왕세자 교육을 받았던 양녕대군. 그를 완벽한 왕세자로 만들려던 노력은 오히려 그를 엇나가게 했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유롭게 자란 양녕대군, 모범을 보여야 하는 세자로서의 삶은 그에게 감옥과 같았다. 하지만 태종은 엇나가는 그를 바로잡기 위해 더 강도 높은 교육을 실시했다. 양녕을 옭아맨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 태종도 막지 못한 금지된 사랑
1418년 6월 18일. 폐위 당시 양녕대군 곁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사대부의 첩이었던 어리. 그녀와의 금지된 만남은 아버지 태종과 조정 신료들의 신임을 잃는 계기가 된다. 위험한 것을 알았음에도 끝까지 어리를 놓지 못했던 양녕대군. 그를 파국으로 몰아간 위험한 스캔들의 전모를 파헤친다.
세자 폐위, 양녕대군 미담의 진실은?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세종이 덕이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했다.”
<연려실기술>中
동생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미담의 주인공, 양녕대군. 하지만 그에 대해 실록은 정 반대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조선의 르네상스, 세종 시대를 이끌어낸 양녕대군의 폐위! 2월 9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역사의 주인공이 바뀐 1418년 6월 3일 그날로 돌아간다.
조선 4대 왕 세종의 첫 번째 형 양녕대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양녕대군에 대한 의견은 실록과 야사에 따라 다르다. 의견 역시 분분하다. 총명한 동생에게 왕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일부로 난폭한 행세를 했다는 것부터 원래 타고난 난봉꾼이었다는 말까지 반응은 극과 극이다.
앙녕대군에 대한 뜻밖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과 사이가 틀어진 후 놀고 먹는 한량 신세로 변했다는 것, 그 배경에는 앙녕대군의 ‘불륜’이 있었다.
양녕대군은 이미 남편이 있던 어리라는 여성을 사모했다. 실록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어리에 대해 “내가 어리의 집을 찾아갔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는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안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천상 미인이었다”고 표했다. 양녕대군은 결국 어리를 평생 곁에 두겠다고 결심했다.
양녕대군은 어리의 남편 곽선에게 선물을 보내며 다신 어리를 찾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시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불륜 행각을 대놓고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대신의 첩을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소문은 개성에 있던 태종에까지 들어갔다.
태종은 분노했지만 양녕대군은 엄청난 분량의 반성문을 태종에게 바쳤고, 이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용서해주기로 결정했다. 반성문을 통해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를 지켜냈다. 문제는 16개월 후였다. 태종은 자신이 용서한 세자를 폐하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양녕이 태종에게 또 다시 보낸 글 때문이었다.
반성문 덕분에 세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양녕대군이지만 어리와의 생이별은 그에게 고단의 연속이었다. 이에 세자빈은 어리를 몸종으로 속여 양녕대군에게 데리고 갔다. 몸져 누워있던 양녕대군은 벌떡 일어났지만 이 사실은 태종의 귀에 모조리 들어갔다.
태종이 어리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파직 시키고 궁에서 쫓아내고, 어리가 자신을 자책하며 자결하자 양녕대군은 결국 비뚤어진 인생을 살게된다. 기생집에 드나드는 것은 물론, 주색잡기 등 왕족으로 해서는 안될 짓들을 감행했다.
이러한 난봉질은 결국 비극의 씨앗이 돼 비극의 시작이 됐다. 1451년 양녕의 셋째 아들은 서까래 목을 매 자결했다. 양녕대군은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양녕대군은 알고보니 아들의 첩을 취하는 패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른 양녕대군의 비극은 그가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