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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 기축옥사 정여립 역모사건 역사저널 그날

송강 정철 기축옥사 정여립 역모사건 역사저널 그날

 

선조 22년

 


천 명의 선비가 목숨을 잃는 피바람이 분다!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
이 엄청난 정치 참극의 중심엔 송강 정철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그는 왜 이 피비린내 나는 옥사의 현장에 있었던 걸까?

 

 

■ 시인 송강 정철의 가려진 얼굴?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겨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진 송강 정철. 1589년, 선조는 정철을 기축옥사의 수사책임자인 위관(委官)에 임명한다.

 

 

 당시 정계에서 물러나있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선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까지 옥사에 연루되면서, 정철에게는 옥사를 무리하게 확대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양날의 칼과 같은 위관직을 맡은 송강 정철. 그는 왜 광풍을 불러일으킨 옥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을까?

 

 

■ 역모인가, 조작인가? 정여립 역모사건을 둘러싼 의혹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 조선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역모 사건은 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역모 사건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옥사로 확대된다.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모두 가혹한 국문을 받는다. 그 결과 수사책임자인 정철조차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조선 최대의 정치 참극, 기축옥사의 발단이 된 정여립 역모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본다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이며 전주 출신이다. 첨정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정여립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또래의 우두머리로 활동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15세 때 이미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을 일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아전들은 그의 부친보다 정여립이 업무를 처리할 때 훨씬 부담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강한 개성과 기질은 형제 및 친척과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자질은 뛰어나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 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 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 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 빙기를 이용해 황해 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 기축옥사의 흑막(黑幕), 선조의 속내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방계 출신에서 왕위에 오른 선조.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동인과 서인을 저울질 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다. 기축옥사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을 등용해 옥사를 확대시킨 것도 선조였다. 하지만 기축옥사의 광풍이 진정되어가던 1591년, 선조는 돌연 태도를 바꾼다. 한때는 독수리의 절개를 가졌다며 총애했던 정철을 좌의정에서 파직시키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선조는 기축옥사의 모든 책임을 정철에게 돌린다. 왕의 갑작스런 변심. 선조가 정철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란 이미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치인 송강 정철의 또 다른 모습. 6월 1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송강 정철의 새로운 모습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