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찬인생 문희 졸도사건 문희 윤정희 남정임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 눈물의 여왕
1960년대 동양 제일의 미모로 스크린을 장악한
1세대 트로이카 '눈물의 여왕' 문희
문희는 섹시 모델 출신?!
방주연이 최초 공개하는 트로이카 배우들의 비화
문희 윤정희 남정임
극장쇼 분장실 사건의 주인공은?!
문희를 중심으로 한 트로이카의 치열한 경쟁
급기야 자진졸도까지?
1966년 춘원 이광수의 ‘유정’으로 한국 최초 TV 공개 모집에서 당선되어 화려하게
데뷔한 남정임은 국도극장에서 3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때는 KBS TV가 사옥이 없어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공개 모집 당시 마지막 두 사람의 후보자 중 누가 당선되느냐를 두고 아나운서가
너무 힘을 주었기 때문에 2등 한 후보자가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후 남정임은 밤낮으로 촬영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문희가 등장하고 윤정희가 발탁되어
세칭 트로이카 시대를 맞게 된다.남정임은 우선 얼굴이 예쁘다.
그리고 온순하고 예의가 바르다. 한부모 가정, 어머니 밑에서 남매가 자랐는데,
어머니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 촬영 때는 으레 어머니를 여배우로 대접하고 딸은 심부름꾼으로 봤다.
남정임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아, 아침 집에서 촬영소로 가는 길에 남의 포스터,
그러니까 문희나 윤정희의 얼굴을 먼저 보면 그날 점심을 굶는다.
문희가 신문사로 갑자기 시집가는 바람에 남정임도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때 재일동포 청년
하나가 신랑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 젊은이를 직접 만난 일이 있는데, 용모로 보나 그가 하는 한국말 솜씨로 보나
한국의 일급 여배우 남정임이 이렇게 숙맥 같은 사내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부 어머니는 그들의 재산에 홀딱 반했다는 소문이 흘렀다.
그녀가 소문도 없이 일본으로 떠나고 딸을 낳았다는 소식도 들렸다.
물론 우리들은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다른 배우로 채우면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1978년 가을, 남정임은 서울로 홀연히 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최인훈 원작 ‘웃음소리’를 맡기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거다,
다 잊어버리고 영화에 열중하자고 타일렀다. 짧은 가을 날씨의 햇볕을 아끼면서
우리는 광릉수목원 숲속에서 며칠을 강행군하면서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사랑의 형태를 어느 정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남정임을 에스코트한 사내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두 번째 남편이다.
둘은 곧 아들과 딸 낳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더욱이 남자가 부자라는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배우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나는 충격 속에서도 한 여배우의 데뷔작과 마지막 작품을 함께 한 것을 큰 인연으로 생각했다.
남정임의 아이들은 잘 커서 배우를 하겠다는 등 소문이 있었지만,
아직 영화에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그 남편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재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기르면서 장모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다.
-여성신문 중에서-
'눈물의 여왕' 문희의 대찬인생이 공개됩니다.
배우 문희의 남편은 20여 년 전 사별한 故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이다
남편과 사별 후 43년 만에 대중 앞에 나선 문희가 근황을 전했다.
너무 빨리 혼자가 되다 보니 혹시 내조가 부족해 남편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며, "사별 후 2년간 칩거생활을 했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지금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립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문희는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사람으로 1971년 전성기를 누리던 당시 출연예정이던
영화 제작을 맡은 故장강재 회장과 결혼 후 은퇴했다.
장강재 회장은 1979년 한국일보 회장에 취임했으며 1993년 간암으로 별세했다.
문희의 미모의 딸 장서정 씨를 공개했다.
현재 문희는 남편이 생전 설립한 장학재단인 '백상재단'에서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