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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영창대군 역사저널 그날 광해군 세자되던날 선조 광해군

광해군 영창대군 역사저널 그날 광해군 세자되던날

선조 광해군

 

 

광해군, 세자 되던 날


조선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려 했던 개혁가.

혹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형제를 죽인 패륜아.

광해군을 둘러싼 극과 극의 평가!

18세에 세자에 책봉돼 왕위에 오르기까지 16년.

과연 무엇이 광해군의 두 얼굴을 만든 것일까.

베일에 싸여있던 광해군의 세자 시절을 통해

광해군을 참모습을 파헤쳐본다!

 

 


■ 고난의 시작 - 아버지 선조의 견제

 

 

전쟁으로 갑작스럽게 세자가 된 광해군. 그는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고 전쟁터를 돌며 민심을 수습한다. 광해군의 분조는 전쟁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져있던 백성들의 구심점이 된다.

 

 명(明) 황제는 칙서까지 보내 선조의 실패를 만회하라며 광해군을 격려한다. 하지만 광해군이 주목 받을수록, 선조는 아들을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한다. 광해군을 아들이 아닌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 부자(父子)관계는 회복되지 못한 채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 절체절명의 위기 - 명의 세자 책봉 거절과 영창대군의 탄생

 

 

아버지 선조의 마음을 잃은 광해군.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벽이 놓여 있었다. 분조 활동을 격려했던 명(明)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세자 책봉 주청을 거절한 것이다. 광해군은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기 때문에 세자 자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세자 책봉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중, 설상가상으로 의인왕후가 승하한다. 선조는 새 왕비를 맞아들였고, 새 왕비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는다. 우려하던 적자의 탄생으로, 광해군의 입지는 한층 위태로워진다.

 

아버지의 견제와 명의 세자 책봉 거부, 예상치 못한 적자의 탄생으로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세자 시절을 보낸 광해군. 8월 30일 토요일 밤 9시 40분 KBS 1TV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세자 광해군이 수많은 난관을 딛고 극적으로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사연을 집중 조명한다.

 

-영창대군-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에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06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의다. 왕비에 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또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을 까닭에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이미 세자 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여기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북파 의 유영경 등은 선조의 생각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 생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달라는 유교를 남기는데, 이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을 궁지로 몰 아넣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 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 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켰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조야에서 끊임 없이 그를 구원해 달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