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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형제복지원 사건 박인근 형제복지지원재단 부산실로암교회 살아남은 아이 사회복지법인 신양원 복지시설 셈터학교 신영중고등학교 사상해수온천

wisdoma21 2014. 3. 22. 22:51

살아남은 아이 형제복지원 사건 박인근 형제복지지원재단 부산실로암교회 사회복지법인 신양원 복지시설 셈터학교 신영중고등학교 사상해수온천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형제복지원의 진실


#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삶을 빼앗겼습니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부산 주례동 산자락에 있는 형제복지원.-

그 날, 엄마를 만나기 위해 대전행 기차를 탄 7살, 5살의 어린 남매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잠깐 잠이 든 사이 목적지를 지나 부산역에 내린 남매는,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정체 모를 트럭에 올랐다. 그런데, 트럭의 짐칸엔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기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던 중학생도 있었고 20대의 젊은이도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다시피 트럭에 태워졌다는 것이다. 불안에 떨며 한참을 달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용소 같은 건물이었고, 그 거대한 철문을 들어서는 순간.. 비극은 시작됐다.

“죽을 때까지 패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시체처럼 질질 끌려가요.

우리를 사람으로 생각 안했던 것 같아요.”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반항하면 몽둥이부터 날아오고...

머리 터진 사람도 숱하게 봤고.”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형제복지원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성폭행, 인권유린, 사람 죽이고...”
그곳’은 마치 군대와도 같았다고 했다. 수용자들에게는 ‘번호’가 붙여졌고, 머리를 짧게 깎인 채 아동소대, 여성소대, 성인소대로 분류되어 ‘내무반’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똑같은 파란색 운동복을 입고 ‘소대장’과 ‘중대장’의 감시 아래, 매일 강도 높은 제식훈련과 강제노역이 이어졌다고 했다. 남매는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어른 아이 구분 없이 가해지는 무자비한 구타와 성폭행이었고, 부상을 입거나 병이 나도 제대로 된 치료는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곳을 ‘지옥’이라고 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어떻게, ‘그곳’에 끌려간 것일까?

-강제노역에 동원된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생활했던 수용시설.

지금은 창문이 뜯겨나간 채 방치돼 있다-

# 복지시설의 추악한 진실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일시보호사업 위탁계약을 맺은 형제복지원은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으며 3,0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했던 전국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기관’이었다. 하지만 1987년, 우연히 산 중턱의 작업장에 감금된 수용자들을 목격한 한 검사의 수사를 시작으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드러났다. 12년의 운영기간 동안 무려 513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고, 수용자들에 대한 폭행과 감금 혐의와 함께 수십 억 원에 달하는 외화가 복지원 내에서 발견됐다.

수사 한 달 만에 형제복지원의 원장 박氏가 특수감금,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검찰 조사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박氏는 7번의 재판 끝에 업무상 횡령, 초지법 위반, 외환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돼 2년 6개월 형을 받았고, 형제복지원의 실태에 대한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부산시와 형제복지원이 맺은 계약서에는 부산시장, 부산북구청장, 사회과장,

복지계장의 사인이 들어 있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경찰이 부랑자와 아이들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했다-

 

형제복지원은 경찰이 단속한 아동 1458명을 데리고 부랑인 보호사업을 시작하면서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소로 성장을 했다.

형제복지원은 매년 운영자금 명목으로 20억을 정부와 부산시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합동으로 부랑이라는 명목하에 이처럼 단속하고

강제고 구금까지 한것을로 밝혀졌다.

이는 군사정권시절 복지국가 건설과 사회정의 구현의 일환으로 "부랑인 정화 사업"

이라는 내무부 훈령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1984년 5월11일,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오른쪽)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81년 4월10일 전두환씨는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채를 파악 하여 관계부처와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

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지휘서신을 내렸다.

 

이후 일주일 만에 관계부처 연석회의가 열리고 부랑인 단속을 실시한 지

8일 만에 1850명이 수용되었다.

 

1987년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을 의뢰한 사람은 31178명이였다고 한다.

 

그 당시 경찰 내부 근무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 인데비해 형제복지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다고 한다.

 


1987년 2월4일에 발표된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 형제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을 의뢰한 사람은 3117명이었다. 당시 경찰 내부 근무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인 데 비해, 형제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다. 공무원이 부랑인을 단속하면 인계서에 서명을 하고, 시설에서 인수증을 받아 인수인계를 끝냈다. 시설에서는 구청에 보고해 수용의뢰서를 발부받아 처리했다.

당시 형제복지원 수사를 담당한 검사는 수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가혹 행위나 강제노역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를 할 수 없었다.

 

정보보조금 횡령액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이마저도 검찰 상부 지시로

6억 8178만원으로 축소했다고 한다.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툭수감금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했다.

이사건은 결국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은 업무상 횡령등 만 인정이 되서

2년 6개월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냈고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원장을 거쳐 국무총리 후보자까지 지명된 김용준씨였다.

 

 


“형제복지원 뒷산에 파면 해골 많이 나올 겁니다.”

“너희들 (시신을) 병원에 다 팔아먹는다고...”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513명의 사망자에 대한 수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 복지원에서 시신을 병원에 팔았다거나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의 진실은 무엇일까?

어떤 시신은 대학병원에 임상용으로 500만원에 팔기도 하고, 암매장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작진은 검찰의 수사 자료를 토대로, 오랜 추적 끝에 당시 형제복지원에서 수용자를 관리 감독하던 ‘소대장’을 만나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CBS뉴스에 따르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사망자가 기존에 알련진 513명보다

38명인 더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에 있는 영락공원 사업단에 따르면 1987년 부터 1988년까지 2년간

형제복지원에서 죽은 사람들 시신 38구가 부산시립공원묘지에 가매장된 것으로

지난21일 밝혀졌다.

이것은 부산직할시 공원묘지관리소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

밝혀져 있으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매장처리부에는 매장일시, 사망장소, 사망일시, 성명, 나이, 사망원인, 형제복지원

이라고 적힌 주소와 함께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기존에는 1975~1986년 까지 12년동안 총 513명이라고 되어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진 후 사회문제가 되면서 이사장이 구속된 뒤에도

2년간 3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형제복지원은 권사정권시절 거리의 부랑인들을 선도한다는 취지로 부랑인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에 매년 3000명 이상의 무연고 장애인이나, 고아, 일반시민

등을 감금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구타와 학대, 암매장한 인권유린 사건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세상에 알려진 후에 2012년 한 피해자가 국회 앞

1인 시위와 시민단체와 피해자, 정치권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3월 24일 "형제목지원 진상 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공동발의할 예정이다.

# 27년, 끝나지 않은‘형제복지원 사건’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 원장 박氏 일가는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법인 명칭을 바꾸고 여전히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5년, 재단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 원을 불법 대출 받은 사실이 부산시의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복지시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수익사업체를 갖고 있고, 국가 보조금을 받고 있으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의 돈을 대출받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데, 건강상의 이유로 외부 출입을 삼가던 원장 박氏가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백한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 진행되고 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지금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7년 전, 끝내 밝혀지지 않은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파헤치며, 원장 박氏가 여전히 재단법인을 운영하며 ‘복지재벌’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을 추적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거리를 잘 청소하였다는 공로로 국민훈장을 수여받았고, 재판에서도 감금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지금은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개명하여 3남인 박천광(37세, 목사)이 맡고 있다. 이 재단은 지금은 장애인 아동 요양시설 실로암의집을 부산 기장에 갖고 있으며, 빅월드 스포츠 센터(사하)와 사상해수온천 사업부, 피부과학연구소(사상구)를 운영하고 있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수익사업체 사상해수온천(좌)과 빅월드 레포츠센터(우). -

박인근의 일가족들은 장학사업, 국내외 선교사업, 무료급식사업, 운전교습소 사업, 자동차정비사업, 개척교회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 신양원, 복지시설 셈터학교(시설명 신영중고등학교: 2004년 인가된 비행청소년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형제복지지원재단과 장애인 요양시설-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사건 후 시설이 폐쇄되었으나 이를 통해 축적한 막대한 재산으로 고급 아파트, 콘도와 골프 회원권 구입과 더불어 다시 다른 곳에 가서 법인을 일으켰다.

 

1984년 어느 늦은 밤, 9살 종선은 낯선 곳으로 끌려간다.
어린 종선에게 그곳은 지옥.
그러나 종선은 살아남는다.
그로부터 28년. 종선이 떠듬떠듬 입을 연다.
37살의 육체에 갇힌 9살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겉모습은 37세의 아저씨지만 내면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냥 나는 9살, 12살의 꼬마가 아닐까? 그러니까 9살짜리 꼬마가 이렇게 글을 써서 들어달라고 하는 거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를 들어주세요.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우리를 봐주세요. 하고 말이다.”
-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 중에서

“역사는 반복되며, 인권이 끝나는 곳에서 지옥은 시작된다.”
- 고은태 (엠네스티 국제집행위원, 중부대 교수)

“반복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
- 유희원 (KBS <추적60분> PD)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면서 개인적인 부 축적과 수많은 사람을 고통과 억압, 죽음,

심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주고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지금에 대한민국이다.

겉으로는 사회사업을 하면서 누구보다 복지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박인근과 그 가족들의 생활을 보면 재벌이나 다름이 없다.

장애인이나 힘든 사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마 그 속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더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 조사를 시작해서 박인근이 저지른 죄값을 끝까지

파해치고 모든 재산은 국민의 한사람인 정말 힘들고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