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비스 앤 헨리8세의 4번째 아내
클레비스 앤 헨리8세의 4번째 아내
클레비스 앤
1515. 9. 22~ 1557. 7. 16 런던.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오빠이자 독일 서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클레베스 공작 빌헬름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9년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결탁해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위협은 헨리 8세의 측근 각료인 토머스 크롬웰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루터파와 잉글랜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결혼을 서둘러 주선하게 했다. 1540년 1월 1일 앤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았고 5일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는 기대했던 것만큼 앤이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곧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데 울화가 치밀게 되었다. 가톨릭 국가들간의 동맹이 실현되지 못하자 이들의 결혼은 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성공회 주교회의는 이 결혼에 대해 무효 선언을 했다. 앤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하고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 그녀는 가끔 궁정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리치먼드와 블레칭글리에서 지냈다.
앤 불린, 제인 시모어 이후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가 된 ‘클레브스의 안네’. 독일의 공주였던 안네는 클레브스 지방을 영지로 하는 윌리엄 공의 누이였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헨리 8세는 북부 독일 지방의 지지를 얻기 위해, 또한 윌리엄 공이 프랑스 왕과 절친하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추한 암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못 생긴 안네의 얼굴을 본 왕은 한 번도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안네와의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안네는 현명하게도 왕과 남매관계를 맺어 정당하고 안전하게 부와 권력을 누렸다.
영국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꾼 이후 헨리 8세의 집권기는 물론 그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통치하던 시기까지, 구교와 신교는 서로 번갈아가며 권력을 쥐고 반대파 종교인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왕과 더불어 절대 권력을 구가하던 추기경 울시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식을 둔 지극히 세속적인 사제였다. 또한 하느님을 섬긴다는 가톨릭 본래의 명분을 잊고 극소수의, 특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제의 신분을 남용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지만 신교를 옹호했던 앤 불린과의 세 겨루기에서 패한 후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던 토마스 모어 역시 종교와 권력의 틈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두터운 신임을 업고 대법관에 취임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왕의 이혼을 완강하게 반대하자 왕은 결국 그를 져버렸다. 모어는 반역죄로 몰려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신교도의 편에 섰던 토마스 크롬웰은 앤 불린을 간통죄로 몰아 처형할 때 앞장섰다. 교황청과 연계된 수도원을 해산하고 국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 최고의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수장령’을 선포하는 등, 그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인을 향한 사랑이 이내 시들어버리듯 신하를 향한 국왕의 신뢰도 오래가지 못했다. 크롬웰이 추천한 ‘클레브스의 안네’와 헨리 8세의 혼인이 6개월 만에 무효화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 정적의 이간질이 더해져 크롬웰은 자신이 내몰았던 앤 불린과 마찬가지로 몰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