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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 폐비 윤씨 내훈 연산군 어머니 의경세자 역사저널 그날 채시라

인수대비 폐비 윤씨 내훈 연산군 어머니  의경세자

 역사저널 그날 채시라 

 

인수대비,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리다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가 있지만
대중들에게 ‘인수대비’로 더 친숙한 인물-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철의 여인!

야심만만한 정치인이자 냉정한 시어머니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비’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15세기 여성지식인으로서의 인수대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인수대비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모습들!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펼쳐진다.

 

 

■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그날’, 인수대비가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린 까닭은?
인수대비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 폐비 윤씨! 두 여인의 대립은 소설이나 사극에서 자주 쓰일 정도로 드라마틱한 소재다. 대중들에게 기센 며느리와 무서운 시어머니로 알려져 있는 두 사람! 인수대비는 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을까? 훗날 조선 왕실에 불어들 피바람을 예고한 ‘그날’로 돌아가 본다.


■ 채시라, 그녀가 <역사저널 그날>을 찾았다?!
사극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수대비’를 열연한 배우, 채시라! 그녀가 <역사저널 그날>을 찾았다?! 누구보다 ‘인수대비’를 잘 아는 배우, 채시라가 생각하는 ‘인수대비’는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네티즌들이 생각하는 ‘인수대비’는 어떤 이미지일까?
해석에 따라 상반된 생각과 평가를 받고 있는 인수대비! 그녀가 <역사저널 그날>에서 생생한 토크로 되살아난다!

 

 

■ 왕비가 되지 못한 세자빈, 12년 만에 다시 입궐하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빈이 된 인수대비! 그러나 남편 ‘의경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1세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에서 나가야 했다.
한편, 시동생이었던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요절한다. 당시 궐내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희왕후가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 당시 후계 서열 3위였던 성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인수대비, 왕실 여성의 기강을 바로잡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여러 차례 양보했을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수대비! 당시 조선은 통치이념이었던 유교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왕실 여성을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꼈던 인수대비! 그녀가 편찬한 책인 <내훈>은 조선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쳐 논란의 중심에 있다. 상반된 평가를 받는 책, <내훈>! 그 내용은 무엇일까

 

 

■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며느리 폐비 윤씨의 악연
성종의 첫 번째 비 공혜왕후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중전의 자리!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폐비 윤씨였다. 여성에게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던 시기에 왕비에 책봉된 폐비 윤씨! 그녀는 투기가 심해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부덕(婦德)을 강조하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기센 며느리 폐비 윤씨와의 대립! 인수대비가 며느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역사저널 그날> 스튜디오에서 패널들 간의 설전이 벌어진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5세기 최고의 여성 지식인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인수대비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스페셜 패널 신명호 사학과 교수와 고아름 한국사 강사가 함께 해 더욱 풍성해진 역사 토크로 시청자의 안방을 찾아갈 <역사저널 그날>! 4월 6일 밤 10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인수대비[소혜왕후](1427~1504)

 7대 세조의 아들 덕종의 부인이자

9대 성종의 어머니 입니다

본관은 청주이고 성은 한씨이며 성격은 강직하고 유교적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성종의 비인 중전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자 윤씨를 폐비시켰고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합세하여 성종에게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약을 내리게 했습니다.

연산군 즉위후 그의 머리에 부딪힌 충격으로 죽고 맙니다

그녀의 저서로는 내훈(內訓)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당시 내명부 및 부녀자를 교화하기 위해 저술한 책입니다

 

 

폐비윤씨(1445?~1482)

 

폐비윤씨 초상화

폐비 윤씨는 성종보다 12살 위였고,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와는 8살 차이가 난다고 하나, 그 생년은 정확하지 않다. 1474년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황후가 승하함에 따라 숙의의 위치에 있던 그녀가 왕비가 되었다. 그 해에 연산군을 낳았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 성종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또한,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1479년에 폐비가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두고저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황후(인수대비)와 정현황후(성종의 3번째 비)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아나 실제 역사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에 추숭되고, 그녀의 묘는 회릉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관작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